[특별기고] 머나먼 아메리카에서 고국으로 전하는 목소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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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머나먼 아메리카에서 고국으로 전하는 목소리 ②
  • 윤준식 기자
  • 승인 2021.03.24 1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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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딛고 기회의 땅에서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루크 강(Luke S. Kahng, 한국명 강석원)은 한국 출신으로는 아주 드물게 미국 치과기공사와 치과의사들이 심미보철분야의 대표연자로 꼽는 유명 치과기공사다. 1996년 이래로 미국 일리노이주 내퍼빌(Naperville,IL)에서 ‘LSK121 Oral Prosthetics’를 운영 중에 있으며 미 전역 48개 이상의 주와 거래하고 SNS와 유튜브 등에 임상 케이스를 매일 업로드하고 있다. 또 과거 QDT, AACD, AAED 등 저널에 110개 이상의 Article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온라인상에서도 인기 스타다. 현재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17만 6천명, 페이스북 팔로워가 1만 8천명, 유튜브 구독자 수가 8만여 명으로 기공계에서는 세계적인 인기 스타다. 도미 치과기공사의 신화와도 같은 그가 본인의 지난날을 회고하며 한국의 숨은 보석을 찾는다. 
<ZERO>는 지난 2월호에 이어서 4월호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던 루크 강 대표만의 이야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윤준식 기자 zero@dentalzero.com


필자는 1967년 가난했던 시기의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났다. 화양동이 내 고향이다. 50대 중반의 지금은 웃으며 회상할 수 있겠지만, 필자의 유년 시절은 그다지 유복하지 않았다. 내가 겨우 2살배기 때 부모님은 서로 각자의 길을 가셨다. 
보통 편부모 가정의 경우 어린 시절 늘 꼬리표를 달고 다니며 놀림을 받기 일쑤인데, 그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격이 완강해서인지 유년시절에 나를 놀리거나 해코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눈물 나게도 어머니는 아주 가련한 인생을 사셨다. 어머니는 과일 장사나 학고방 같은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홀로 두 아들을 키우셨는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힘듦을 늘 지켜보며 자랐다. 
내가 여섯 살이었던 어느 날,  주취자가 몇 시간에 걸쳐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는 공포감과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셨고 동생은 아주 어린 갓난쟁이였다. 그때 나는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께 ‘걱정하지 마라 내가 지키겠다’고 말씀 드렸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난다. 이렇듯 우리 세 식구는 늘 공포 속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아갔다. 
어릴 때 내 집은 가난했고 사글세를 살았다. 그 집은 네 가구가 살았는데 공동 화장실을 썼었다. 방이 8개고 화장실이 7개인 지금도 그 끔찍한 냄새가 콧잔등을 휩쓴다. 파리가 들끓었던 집에서 세 식구는 버텨냈다. 

그런 가난 속에서도 나는 장안초등학교 5학년 시절부터 배명중학교를 거쳐 배명고등학교 1학년까지 야구 선수 생활을 하며 또 다른 꿈을 키웠다. 구속도 빨라 굉장한 유망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렇게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되니 질투와 시기는 낚싯줄에 걸린 생선과 같이 따라왔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선배들의 폭력이 정당화되던 시기였다. 나는 늘 맞았다.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았지만 에이스는 경기에 나서야 한다는 당시 동기들의 도움에 나는 그 폭력의 칼날을 조금은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시련은 또 나를 찾아왔다. 너무 열심히 던지고 훈련해서였을까. 어느 순간 오른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이유가 두 가지란다. 하나는 혹사였고 또 하나는 너무 못 먹어서였다. 그런 상황임에도 에이스라는 미명하에 더 많이 던진 게 화근이었다. 결국 선수 생명을 걸고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7시간의 수술을 마쳤으나 나는 공을 다시 집어들 수 없었다. 여기서 또 나의 꿈은 무너졌다. 그 후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운동만 했기 때문에 공부를 하나도 안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영어 알파벳도 알지 못했고 국어 교과서의 ‘용비어천가’도 무엇인지 몰랐다. 
또 야구를 그만두면서 체육 특기생 자격이 박탈되어 건국사대부고로 전학을 가게 됐는데 국어 선생님께 행색이 불량하다고 온갖 매질을 당했다. 사춘기여서 그랬을까? 나는 반항심이 품게 됐고 그때부터 어두운 길을 걷게 됐다. 학생임에도 당구장과 오락실, 나이트클럽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흡연과 무단결석을 일삼았다. 431명 중 꼴찌는 늘 나였다. 

그럼에도 조인섭 선생님께서는 나를 불쌍히 여겨 체벌하지 않고 부드럽게 지켜봐 주셨다. 참 감사한 분이다. 그렇게 1년 반 동안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는데 고3 때 어김없이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다가 어느 순간 불빛을 바라봤다.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내가 여기 있을 때가 아닌데...공부를 해야 하는데 내가 왜 여기에 있지?’라는 생각이 갑작스럽게 들었다. 그다음부터 머리를 깎고 교련복을 입으며 교실의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뒤집어졌다. 그런데 운동만 하다가 공부를 하려니 앉아있기가 쉬울 턱이 있나? 그럼에도 16시간 동안 악착같이 앉아있었다. 학문에 대한 기본기가 전혀 없었던 나는 무조건 외우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나는 졸업 당시 200등까지 성적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대학교에 대한 희망이 생겼지만 아쉽게도 재수를 택했고 더 열심히 했지만 대학에 또 낙방했다. 목표가 점점 높아졌기 때문이다. 결국 삼수로 학력고사 247점을 기록하고 동국대학교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엉망이었던 내신 성적을 보고 입학관은 커닝을 하지 않았냐는 의심을 했다. 결국에는 또 떨어졌다. 

이후 나는 4수를 택했지만 어느 순간 허탈함이 나를 둘러쌌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렇게 잠시 방황하고 있던 찰나에 당시 미국 총영사로 근무하고 계셨던 외삼촌이 미국에서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해보자는 말씀을 건네셨다. 결국 나는 도미를 결심했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생의 2막을 시작하게 됐다. 이민 후 메릴랜드에 위치한 외숙모의 지인이 운영하는 기공소에 입사하게 됐다. 나를 지금껏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치과기공과의 첫 만남이었다. 다행이었다. 나는 자라온 환경과 주변인들로 인해 눈치를 많이 보고 피해가며 잔머리를 굴리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만약 미국에 이민을 가 부동산 등 다른 일을 했다면 아마 나는 사기꾼이 됐을 것 같다. 기공을 하면서 지금과 같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맞이한 치과기공은 지옥 같았다. 작은 오피스에서 온갖 소음과 함께 꼬박 16시간을 일했다. 당시에는 영주권이 없어서 모든 일을 도맡아 했고 일요일도 쉬지 못했다. 개만도 못하다는 욕도 많이 들었다. 아무런 배경이 없는 사람이어서 더욱 그랬나 보다. 그렇게 메릴랜드에서의 1990년을 살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태평양을 건너와 영어도 참 힘들었다. 처음에는 의사소통이 당연히 되지 않았다. 바디랭귀지도 한계여서 속이 답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국어로 먼저 쓰고 영어로 번역한 다음 이를 외워서 말하고 다녔다. 그러면 상대방이 이야기를 해주는데 문제는 내가 전혀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 난관을 극복하고자 상대방에게 지금 하는 말을 적어달라고도 했고 항상 라디오를 들으며 훈련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니 철자가 틀려서 면박을 받더라도 다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히 영어를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딛고 일어나 1996년 나만의 기공소를 개설했다. 초기에는 경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형편없었다. 그때 내 자신에게 한계를 느껴 각종 세미나를 참 많이 다녔던 것 같다. 또 테크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경영자로서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샘플을 만들어 직접 치과를 찾아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 준비를 안 했던 것 같다. 기공소를 창업하려면 우선 기본적인 크라운&브릿지 테크닉이 완벽해야 하고 비즈니스를 위해 본인이 갖고 있는 비전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실내 규모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테이블은 몇 개를 갖출 것인지, 직원을 몇 명을 고용할 것인지를 작성해 업체와 협상을 해야 했는데 나는 그것을 몰랐다. 전압과 동선도 고려해야 했으며 미래도 생각해 봐야 했다. 당시 경영에 대한 노하우가 없었던 것이 참 힘들었는데 차차 몸으로 경험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항상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8년 전에 10년간 함께했던 창업 멤버들이 바로 근처에 다른 기공소를 차린 사건이 기억이 난다. 100만 달러에 달하는 거래처를 함께 가지고 나가는 동시에 그들은 나를 고발했다. 주 40시간과 관련된 노동법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점심도 2시간을 부여했고 아침 11시에 출근하기도 했던 것을 다 이해해줬는데 5년 동안의 법정싸움에 힘들고 실망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고난을 감사하게 여겼다. 본래 국가나 사업이 성장하면 항상 개국공신들이 반기를 들기 마련이다. 많은 법정 비용과 시간을 소모했지만 이를 통해 나는 더욱 큰 뜻을 품게 됐다. 8년 전에는 거래처가 일리노이주에서만 95%를 차지했지만 현재는 48개 주와 거래를 하고 있다. 그 고난을 이겨낸 것이다. 한때는 참 미웠지만 내 성공에 자극제를 제공해줬다는 것에 현재는 감사하다. 아마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들 덕분에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쓰라린 과거를 가졌지만 이를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은 그 시절이 그립다. 공동 화장실의 악취도 그립다. 하지만 이를 다시는 가질 수 없기에 오늘의 이 순간을 즐기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한편으로는 하필 어린 나이에 오른팔이 이렇게 됐을까 싶지만 이 또한 축복이었다. 미국에 와서도 팔의 후유증으로 고생을 많이 하게 돼 어떻게 하면 빠르며 쉽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두뇌를 만들 수 있게 됐다. 그 덕분에 지금 이 순간에 어떤 불행한 일을 겪어도 미래에는 축복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당시에는 내가 박철순과 같은 유명한 선수가 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치과기공이라는 더 큰 복을 내려주셨는지 모르겠다. 

어렵고 서럽고 가난했으며 아무도 돌봐주는 이가 없어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 모든 악조건들이 축복이 됐다. 내게 있어 더욱 큰 깨달음은 배경이 없음에 힘들어하지 말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으면 언제든지 길이 열려있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다. 
나는 이 글을 보는 모든 이에게 주변을 탓하지 말고 앞날만 보며 자신의 경주를 즐기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 역시도 이런 깨달음을 얻으면서 미국에서 버틸 수가 있었다. 
이제는 내가 도움받고 누렸던 것들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다. 슬퍼하지 말 것이며, 괴로워하지도 말 것이고 어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함께 전하고 싶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어떤 일도 잘할 수 있고 행복하다는 것을 몸소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을 응원하며, 미국에 도전하려는 꿈을 품은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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