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국모에서 노비가 된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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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국모에서 노비가 된 왕비
  • 권영국 소장(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
  • 승인 2021.09.02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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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후손들은 교훈을 얻는다. 현대인들의 지나온 삶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 치과기공사로서는 드물게 역사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장(비전포럼 명예회장)의 색다른 역사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지난 호에 단종 임금의 안타까운 스토리를 소개했었는데 이번 호에서는 그의 비였던 정순왕후(定順王后) 송 씨의 파란만장 했던 삶은 어떠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역대 왕비 중 폐비 윤 씨(연산군의 어머니)나 장희빈(숙종의 빈)같이 사약을 먹고 죽은 왕비는 있었어도 노비 신세로 전락한 왕비는 정순왕후가 유일하지 않겠나 싶다.
단종이 왕위에 오른 후 숙부인 수양대군은 속내를 숨긴 채 단종을 위하는 척 혼사를 주관하니 단종의 나이 14세, 송 씨의 나이 15세였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발단이 되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후 영월로 귀향길에 오르고 정순왕후는 노비로 전락하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청계천의 영도교 위에서 둘은 생이별을 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단종과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영도교는 동대문 인근에 있는 청계천 다리로 ‘영원히 이별한 다리’라 하여 영도교라 이름이 붙여지게 됐다.
기가 막힌 건 정순왕후가 노비로 신분이 격하되자 사대부들 사이에선 서로 그녀를 자기의 노비로 삼고자 혈안이 됐었다고 한다. 세조는 일말의 양심으로 정순왕후가 비록 노비의 신분이지만 아무도 노비로 부리지 못하도록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지금의 창신동에 있는 청룡사 바로 옆의 초암에서 기거하게 된다. 다행히도 그녀를 모시던 궁녀 세 명이 의리를 지키며 함께 하였다. 정순왕후는 단종에 대한 그리움과 안녕을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동산에 올라 단종이 있는 동쪽을 보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했는데 그녀가 올라가 통곡했던 그곳을 영월이 있는 동쪽을 보고 기원했다는 뜻으로 ‘동망봉’이라고 한다.

정순왕후는 백성들이 몰래 가져다주는 음식과 함께 생활한 궁녀들이 구걸해 얻은 것으로 겨우 연명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세조는 쌀과 음식 등을 하사했는데 그녀는 ‘내가 굶어 죽을지언정 원수가 주는 음식은 안 받겠다’ 하여 다시 궁으로 돌려보내니 세조는 대노하였고 누구든 송 씨를 도와주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어명을 내린다. 그녀의 강한 절개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백성들은 정순왕후의 집 근처에 여인들만 드나드는 야채 시장을 열어 누가 가져다 준지 모르게 야채를 집에 던져놓고 갔다. 이를 ‘여인시장’이라고 하였는데 동묘 옆에 위치했고 지금은 벼룩시장의 모습으로 변모하여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정순왕후는 그냥 얻어먹고만 있을 수 없어 염색 일을 시작했는데 자주색을 내는 염색을 주업으로 하였다. 주변의 여인들은 일감을 주기 위해 자주색 옷고름을 달기 시작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저고리의 옷고름 색을 달리하는 유행이 전해진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 일들이 유래가 되어 그 동네는 지금도 ‘자줏골’이라 불린다. 그녀가 염색 작업했던 작은 샘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어 그 샘의 이름을 ‘자주동샘’이라고 한다.
필자가 탐방하고자 자주동샘을 찾아갔던 적이 있었는데 이정표도 없어서 그 장소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 지나가던 근처 사찰의 스님께서 친절히 안내해 주셔서 가 볼 수 있었는데 낙산공원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으며 조선 시대의 백과사전격인 지봉유설을 지은 이수광 선생이 칩거하며 저술 활동을 했다는 비우당의 뒤뜰에 너무도 초라하게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물도 마르고 볼품없이 방치되어 있지만 그 시절 국모가 한을 가슴에 가지고 그토록 험한 노동을 하시며 생을 연명했던 곳이라 생각하니 한쪽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 밀려왔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훗날 숙종에 의해 다시 직위가 복위되었고 정순왕후가 기거했던 초암을 ‘정업원’이라 했다. 영조가 정순왕후를 기리며 친필로 썼다는 비문인 ‘정업원구기’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정순왕후는 70세가 넘게 살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하시니 남양주에 있는 사릉에 영면해 계신다. 사릉역은 근처 정순왕후의 사릉이 유래가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의 한이 깃든 유적과 현대의 고층 아파트가 공존하고 있는 창신동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 보면 “여보게! 한 맺힌 내 사연을 들어보겠나” 하는 그 옛날 한 여인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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