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시간] 12월, 당신 마음에 씨앗 하나!
“뭐든 마무리가 좋아야 해, 그간 아무리 잘했어도 마무리가 매끄럽지 않으면 개운치가 않더라고” 그날 오랜만에 연락된 친구와의 대화는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이 말로 끝을 맺었다.
새해가 되었다며 설레는 마음으로 플래너를 사고, 호기롭게 신년 계획을 적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12월이다.
올해 유난히 제 멋대로였던 봄, 무료하리만큼 길었던 여름, 존재감이 미약했던 가을을 지나 이제, 겨울. 마무리의 계절이다.
24절기상으로 보았을 때 겨울의 시작은 입동이 아니라 상강이다. 서리 상(霜)과 내릴 강(降)의 한자를 쓰는 상강은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린다’라는 뜻을 가진 절기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식물들은 잎을 떨구며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동물들은 겨울잠을 위한 채비를 서두른다. 그리고 입동에 접어들면 본격적인 겨울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의하면,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가 명계(冥界)의 왕인 하데스에게 납치되면서 겨울이 생겼다고 한다. 슬픔에 빠진 데메테르가 딸을 찾아 헤매는 동안 대지는 황폐해지고, 식물들은 말라버린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제우스가 하데스에게 명하여 데메테르에게 페르세포네를 돌려보낸다. 그러나 명계에서 석류 세 알을 먹은 페르세포네는 그곳의 규칙에 따라 일 년 중 3개월은 명계에 머무르게 된다.
그래서 페르세포네가 명계에 있는 3개월 동안은 대지가 황폐해지는 겨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한 가지는 페르세포네가 죽음을 관장하는 명계의 여왕인 동시에 봄과 씨앗의 여신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시작과 끝이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리라.
생각해 보면 끝이 없는 시작이 있을 수 없고, 시작이 없는 끝 역시 있을 수 없다. 그 둘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팎의 구분 없이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굳이 그 둘 중 중한 정도를 가려 하나를 고르라면 좋은 끝을 고르고 싶다.
이스라엘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뇌는 ‘정점과 종점의 규칙’에 따라 자신의 경험을 기억한다고 한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어떠한 사건을 기억할 때 경험의 총량에 비례해 사건을 기억한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뇌는 가장 기뻤을 당시 정점의 기억과 그 사건의 마지막 종점의 기억만을 저장한다.
즉, 지난 일들을 기억하거나 평가할 때 ‘가장 좋았던 일’과 ‘가장 마지막 일’이 기억의 전체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시작과 과정이 다소 험난했다 하더라도 결과가 좋았을 때, 그 일을 우리가 값진 경험으로 기억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정점과 종점의 규칙’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유능하거나 원만한 사람들은 모두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흔히 말하는 유능한 사람들은 어떠한 일을 하든지 간에 그 일의 마무리가 아주 깔끔하다.
그리고 대인 관계가 원만한 사람들은 친분을 쌓는 과정뿐만 아니라 관계를 정리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기본적 예의와 배려를 잊지 않는다. 이 두 부류 사람들의 공통점은 ‘좋은 마무리’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맺은 좋은 마무리는 다시 좋은 시작의 발판이 되어준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나는 한 해 동안 나에게 의미 있었던 일들의 목록을 정리한다. 그리고 다가올 겨울을 위해 집 안으로 들여놓을 화분을 손질한다. 생각보다 꽤 손이 가고 귀찮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다시 올 새봄, 새싹을 보기는 힘들다.
나에게 있어 목록 정리는 일종의 화분 정리와 비슷하다. 올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정성을 쏟은 일을 확인하고, 계속 진행해야 할 것들과 멈춰야 하는 것들, 그리고 혹시라도 방향을 바꿔 재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구분한다. 이 일은 나에게 마무리인 동시에 시작을 준비하는 일이다. 마치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화분처럼 말이다.
12월의 겨울은 조용한 계절이 아니다. 다가올 봄을 위한 가장 역동적인 계절이다. 하여 이번 겨울, 당신도 다가올 봄을 위해 당신의 마음에 씨앗을 하나 심어보았으면 좋겠다. 마무리이자 시작인 이 계절에 말이다.
덧: 올해 나의 목록에는 이 지면의 원고투고가 자리 잡을 예정이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