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시대를 뛰어넘는 조선 3대 천재의 능력치는? ③-2편

역사속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많지만 조선시대를 통해 3명만 뽑으라면 보통은 김시습, 이이, 정약용을 선정하는데 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어떤 기준으로 천재를 선정하였냐의 잣대는 모호하지만 사회의 기여도와 역사서를 바탕으로 한 후대의 평가, 그리고 각 언론사의 선정을 기준하여 선정해 본다.

2025-05-21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 권영국 소장

냉철한 개혁가 율곡 이이
율곡 이이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그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은 우리나라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은 이이를 키운 현모는 인정할 수 있겠지만 양처라는 수식어는 좀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 게 사실이다.

천재 아들 이이가 있었기에 그의 어머니도 더불어 유명해진 게 아닌가 싶다. 어찌됐든 두 모자는 우리나라 오만원권과 오천원권 지폐의 표지모델로 등극되어 있다.

1536년 강릉 오죽헌에서 한 아이가 셋째로 태어나니 그가 율곡 이이다. 어려서부터 두각을 드러낸 그의 천재성은 3살 때부터 글을 배워 10살이 되기까지 역사책이나 유교 경전 등을 두루 익혔고, 유년 시절에 종종 훌륭한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천재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는 13살 어린 나이에 과거시험을 보게 되는데 초시에 장원급제를 하여 주변사람들을 경악케 하였다. 본고사인 복시에는 응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단지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 해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그가 16살때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이는 큰 상실감에 빠졌고, 새부인을 들인 아버지 이원수와는 사이는 좋지 않았다. 이이는 어머니 죽음 이후 허망함과 슬픔에 사로잡혀 봉은사에서 불교 경전을 공부하며 불교에 심취하였고, 어머니 삼년상을 치룬 후 출가를 하여 19살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찾고자 했던 학문이 유학에 있음을 깨닫고 1년 만에 하산을 하게 된다.

그는 충동적이었던 출가를 후회하며 다시 과거시험을 준비한다. 성리학을 떠나 이단의 길을 갔다는 이유로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서 큰 비난을 받았으나 21살에 두 번째 치룬 과거시험에서 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23살 때 별시의 장원으로 합격한 후 29살 때는 초시와 복시 그리고 대과를 포함해 총 9번의 장원급제를 하면서 '구도장원공'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였다.

정6품에 등용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한 이이는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 정치적 혼란 가운데 있었던 조선이 문정왕후를 배후에 둔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외척세력에 의해 또다시 을사사화가 일어나 많은 공신들이 희생을 당하는 것을 보고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려 세도정치 세력들을 탄핵하는 위훈삭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정통성이 부족한 선조가 집권하는데, 이때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이 득세하여 본격적인 붕당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이이는 중도를 표명하며 각당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으나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이는 나라의 위태로움과 해결책을 선조에게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선조의 미온적인 태도에 실망하여 사직을 하기도 했으나 이이를 신뢰한 선조는 그를 다시 불러 들였고, 당파싸움 해결을 위해 이이는 많은 노력을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외로운 투쟁을 하면서 경제개혁을 위한 경제사 설치도 추진했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이는 국방에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임진왜란 전에도 사방에서 왜구의 침탈은 계속 되었지만 부실한 조선의 병력은 이를 막아낼 수 없였다. 이에 병조판서시절 군사의 증원과 군량미 확보를 위한 세금제도의 개편을 주장한 시무6조를 지어 올렸다.

이때 앞으로 10년 뒤에 큰화가 있을 것임을 예견해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지만 조선은 그저 안일할 뿐이었다. 이이는 당쟁에 시달리고 모함을 받으면서 병석에 눕게 되었고, 결국 4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로써 나라를 살리는 탁월한 기획안들을 제시했던 조선의 고독한 이 천재는 피터지는 당쟁과 선조의 무능함으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흡사 작금의 정치환경과 닮아있는 듯하다.

율곡 이이는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파주에 있는 자운선원에 그의 영정과 위폐가 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인근에 그의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가족묘로 조성되어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