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성씨의 허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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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성씨의 허구 ①
  • 권영국 소장
  • 승인 2022.03.04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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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후손들은 교훈을 얻는다. 현대인들의 지나온 삶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 치과기공사로서는 드물게 역사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장(비전포럼 명예회장)의 색다른 역사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2015년 기준 인구주택 총 조사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씨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순으로 김 씨, 이 씨, 박 씨가 있다. 우리나라 인구 절반 정도가 이 세 가지 성씨를 가지고 있으며 2022년인 지금도 큰 차이는 없다. 
우리나라 성씨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삼국시대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리나라 왕족이나 귀족들은 주로 중국의 성씨를 빌려 사용했다. 6세기 이전에는 성씨가 없었으며 거칠부, 이사부 같은 이두식 이름을 주로 사용했다. 이후 고려 시대로 접어들면서 양민들도 성을 쓰기 시작했고, 태조 왕건의 통치 전략으로 무차별 성씨를 하사한 것도 큰 이유도 들을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성과 족보를 사고 파는 일들이 보편화됐고 1909년 새민적법 시행으로 누구나 성과 본관을 갖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 성씨는 5천 개가 넘는 성씨가 있는데 그 중 우리 고유의 성씨는 약 280여 개가 있고, 나머지 성씨는 다문화 시대로 외국에서 귀화한 성씨가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성씨와 족보의 90%가 가짜라는 말을 한 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과연 사실인지 여러 자료와 합리적인 상식을 통해 성씨와 족보에 대한 허구와 그 실체에 대해 네 가지의 이유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성씨의 허구를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왕족의 후손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성씨인 김 씨의 대표적 본관은 가야를 창건한 김수로왕 후손으로 알려진 김해 김씨가 가장 많다. 이 씨의 대표적 본관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후손 전주 이씨, 그리고 박 씨의 대표적 본관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 후손 밀양 박씨가 가장 많다. 왕족의 후손이라 알고 있는 이 세 개의 성씨 중 위에서 설명한 대표적인 본관을 가진 인구만 2015년 기준으로 10,234,674명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약 20%가 된다. 이 통계만 봐도 의아한 부분이 있다. 왕족 후손들은 미친 듯이 자녀를 생산했다는 것인가? 참고로 우리와 인접한 국가인 중국과 일본을 포함해서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는 가장 많은 성씨가 전체인구의 2%가 넘는 나라가 거의 없는 걸로 봐서 분명 이상한 점이 있다.
성씨가 허구인 두 번째 이유는 조선 후기 공명첩 남발을 들을 수 있다. 조선 전기 양반의 분포가 전체인구의 10% 정도됐고 성도 족보 특정 계층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17세기 조선 후기 이후부터 성을 가진 양반 계층이 급격히 증가하여 19세기 후반에는 70%에 육박하게 된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가의 재정을 국가의 공식 매관매직 문서인 공명첩을 발행해 국가재정을 충당했다.
공명첩이란 말 그대로 이름을 비워 놓은 관직 임명서인데 돈만 내면 아무나 그 빈칸에 이름을 적어 관직을 임명해주는 문서이다. 즉, 양반이 아닌 평민이나 천민도 돈만 있으면 관직을 받고 양반이 될 수 있었던 신분 상승의 기회가 널려 있었다. 하지만 공명첩의 임명장은 직접 실무를 하는 관직을 주는 게 아니라 이름만 올리는 명예직이었으니 행정상으로는 양반이 되는 것이다.
재산을 다 팔아 공명첩을 받으려는 이유는 양반이 되어 가문의 명예가 올라가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양반이 되면 군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양반이 아닌 대부분 사람은 성씨도 없었고 족보도 없었기 때문에 몰락한 양반의 족보를 사고파는 일들이 성행했고 또는 양반의 족보에 돈을 주고 자신의 이름을 살짝 올려 명문가의 반열에 입성하는 일들도 많았다고 하니 이 시기에 이를 대신 처리해주는 족보 브로커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때 성을 갖지 못했던 많은 평민이나 천민들이 이 공명첩을 계기로 양반의 성씨에 대거 유입됐던 계기가 되었다.
영조실록에 보면 이 공명첩의 비리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역관이었던 임금께 아뢰기를 “김경희라는 자가 사사로이 활자를 주조해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사람들의 보첩(족보)을 많이 모아 놓고 군역을 면제받으려는 자들을 유인해 책장을 바꾸어 주는 것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법조가 엄중히 조사하여 중히 다스리도록 하소서”하고 간언하니 임금께서 “윤허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와 있는데 이를 볼 때 공명첩의 보편적인 남발과 이에 관련된 사기도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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