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조선판 예인, 기생의 모든 것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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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조선판 예인, 기생의 모든 것 ②
  • 권영국 소장
  • 승인 2022.05.3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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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후손들은 교훈을 얻는다. 현대인들의 지나온 삶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 치과기공사로서는 드물게 역사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장(비전포럼 명예회장)의 색다른 역사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1편에 이어>

 

하지만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예와 의를 가장 중요시하는 성리학의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에서 기생을 양성하고 잠자리 시중까지 들게 하는 것은 유교적 명분론에 맞지 않는 일이었기에 세종 때 기생제도의 존립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기생을 없애면 사대부들이 사가의 여인들을 착취하여 더 큰 사회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신하들의 간언으로 기생제도는 존속하게 됐다. 겉으로 품위 있는 척 하면서 뒤에서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양반들의 야사는 이 밤이 새도록 다해도 모자란 코미디가 아닌가 싶다.
이처럼 기생은 주로 조선시대의 왕족과 양반들을 상대했는데 그들과 많은 스캔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스토리를 소개하자면 태종 때 가무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기생 가희아는 사대부와 임금의 마음까지 훔친 희대의 인물로 유명하다. 태종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참고하면 당시 기세가 높았던 두 관료 김우와 황상이 서로 가희아라는 기생을 사이에 두고 큰 싸움이 일어났다. 이 싸움은 단순한 다툼을 넘어서서 병사를 일으킬 정도로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화가나 기생 때문에 관료의 체통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황상은 파직시켰으며 공신이었던 김우는 한 번은 눈감아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몇 년 후 태종이 그 문제의 가희아를 첩으로 들이는 기막힌 일이 벌어져 놀라움을 샀다. 
그 외에도 조선의 잘나가던 선비들을 치마폭으로 농락한 여인 황진이가 있었고 폭군 연산군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했던 기생 출신의 후궁 장녹수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시간이 흘러 기생 제도에도 변화가 생기게 된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좌에 앉은 후 궁궐의 기생 양성소인 장악원이 폐지되며 국가의 공식적인 기생은 사라지고 기생은 두 가지의 유형으로 변화되게 된다. 공연만 하는 기생과 성접대를 하는 기생, 두 부류로 나누어지면서 원래의 기생 개념과는 다소 변질된 모습으로 바뀌게 됐다. 이후부터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가공식 기생에서 사가에서 기생을 양성하는 기방들이 등장 했고 구한말에 권번으로 이름이 바뀌게 됐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 기생의 이미지는 천한 매춘부로 폄하 왜곡되어지게 된다. 그 시대에 유명했던 기생으로는 경성 최고의 기생집으로 알려져 있는 명월관의 대표주자 이난향과 일본 고위관료들을 줄줄이 복상사하게 만든 홍련이라는 인물을 들 수 있겠다.
이난향은 평양 기생 출신인데 노래를 굉장히 잘해 경성의 명월관으로 스카우트 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로 음반을 낸 가수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난향의 노래는 지직거리는 축음기의 소리로 유튜브에 검색해보면 지금도 누구나 들을 수 있다. 그녀의 노래를 들어보면 지금 우리의 정서와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당시에 음반을 통해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대단한 일이었고 이난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했다.
또 다른 인물인 홍련은 독립운동 차원에서 일제의 고위관료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고문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생식기를 박제해 보관했다는 일제의 끔찍한 만행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이다.
조선의 철저한 신분제도 아래 예인의 삶을 살아갔지만 한편으로는 접대부로 전락해 우리의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기생. 이들을 잘했다고 해야할 지 지탄해야할 대상이었는지 일장일단이 있었기에 판단이 어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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