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처세는 하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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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처세는 하륜처럼!
  • 권영국 소장
  • 승인 2022.09.0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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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후손들은 교훈을 얻는다. 현대인들의 지나온 삶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 치과기공사로서는 드물게 역사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장(비전포럼 명예회장)의 색다른 역사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의 군주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를 돕는 세력이 있어야 하고 그 중심에는 항상 킹메이커 역할을 하는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다. 조선의 경우를 보더라도 태조 이성계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왕인 순종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 중에 적장자는 겨우 7명뿐이었으니 얼마나 복잡한 권력싸움과 암투가 있었는지 가히 짐작이 되는 상황이다.
조선의 킹메이커하면 대표적으로 이성계의 남자 정도전이 있었고 이방원의 남자 하륜, 그리고 수양대군 세조의 남자 한명회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그중에서는 본받을만한 인물도 있고 지탄받을 인물도 있겠지만 그들의 처세와 지혜를 통해 지금 우리의 삶을 조명해 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인생은 하륜처럼! 이라는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하륜이라는 인물은 역사적으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존재감이 다소 저평가 되어있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하륜의 처세가 도대체 어떠했기에 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이름이 회자되고 있는 것일까?
하륜은 호방한 성품으로 시대를 꿰뚫어보는 지혜와 온유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정도전에 버금가는 업적도 많이 남긴 인물이다. 하륜은 고려 말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문세족 가문의 사위 출신으로 1360년에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8살의 약관의 나이에 당당히 문과에 급제한 수재 중의 수재였다. 이후 우리가 잘 아는 정도전, 정몽주 등과 함께 이색학당에서 활동하며 관직생활을 하였다. 
하륜은 이성계가 조선 수도 천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 존재감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뿌리 깊은 권문세족들의 존재감이 그득했던 당시 수도 개경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펼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지금의 계룡산 인근을 도읍지로 결정하고 10개월가량 공사를 진행했는데 하륜은 이곳이 풍수 지리학적으로 길지가 아니며 입지가 좁아 수도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 의견이 받아 들여져 모든 공사를 중단하고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사실 고려 말 왕위에 군림했던 권문세족들의 횡포를 보다 못해 신진 사대부인 정도전과 신흥 무인세력인 이성계가 손을 잡고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했으니 그 혁명 성공 후 권문세족들은 큰 화를 당하게 된다. 여기서 하륜이 조금만 모난 모습을 보였다면 가차 없이 제거 됐겠지만 하륜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낮게 낮췄기 때문에 살아났고 지방의 한직을 전전하며 별 볼일 없이 지내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 혼례식에 초대받아 가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훗날 원경왕후가 될 민씨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혼례였다. 명리학에 밝았던 하륜은 그 집 사위가 될 이방원의 얼굴을 보고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깨닫고 친구인 민제의 도움을 받아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친분관계를 형성하며 그들의 인연은 시작되게 됐다. 당시 실세였던 정도전과는 정치적으로 척이 져있던 하륜이 재기의 기회를 보며 정도전의 반대세력은 찾아 나섰다는 해석에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하륜은 혁명세력인 정도전에게는 눈의 가시인 인물이었기에 먼 지방으로 좌천되어 가게 되는데 그때 하륜이 이방원에게 미리 귀띔을 통해 거사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이숙번 대감을 잡으라고 조언을 해주게 된다. 이숙번은 사병집단이 있었고 정도전과 정치적 대립이 있는 인물 이었기에 이성계의 세자 책봉에 불만이 많았던 이방원 그리고 이숙번 .하륜이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규합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반대세력인 정도전은 방원에 의해 사사되고 방원은 바로 왕이 되지 않고 둘째형 방과를 왕위에 앉히게 되는데 이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방원의 계책 이었다. 실권은 방원이 다잡고 있었고 차기 대권을  겨냥하여 징검다리 왕인 정종을 앉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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