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고인돌의 재해석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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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고인돌의 재해석②
  • 권영국 베스트라인기공소 대표
  • 승인 2023.07.21 1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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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보통 고인돌을 ‘족장의 무덤’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창에 있는 수백기의 고인돌이 과연 전부 족장의 무덤이었을까? 보통 족장의 무덤에는 권력을 상징하는 비파형 동검이나 청동거울 또는 팔주령 같은 유물들이 출토된다. 하지만 고창에서는 그런 유물들이 발견된 고인돌은 그리 많지 않다. 1992년도에 고창 매산마을의 고인돌 군을 발굴 했는데 그 고인돌들은 규모도 작고 권력을 상징할만한 부장품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특히 대구에서 발견된 고인돌에 묻혀있는 유골과 치아를 분석한 결과 20세 전후의 여성이었고 그 옆에 누워있는 유골은 어린아이의 유골로 판명 됐다. 충북 옥천의 고인돌에서도 여성의 유골로 예측되는 두개골이 발견됐다. 즉 고인돌은 족장뿐 아니라 신분의 고하와 관계없이 공동묘지 같이 그 시절의 평범한 무덤인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고인돌의 덮개석에는 사람이나 동물형상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부엉이. 호랑이, 거북이, 개구리 같은 동물 형상도 있고 배 모형을 새겨놓은 경우도 있다. 이런 고인돌의 문양은 재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당시는 자연을 숭배하는 애니미즘이나 동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시기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설이다. 고인돌의 덮개석은 밥상처럼 평평한 돌을 사용했고 그 크기는 고대의 종교의식의 제단으로 사용하기에 충분했으며 그 제물을 그려놓아 대체효과를 연출했다. 또한 그런 동물들을 많이 잡을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의미로 사용 되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평안남도나 황해도 그리고 전라남도에서 발견된 고인돌에서는 북두칠성과 같은 별자리를 새겨놓은 고인돌도 있는데 별의 위치를 보면 대략 기원전 대략 기원전 1000년경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용덕리 고인돌의 별자리 암각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암각화로 기록되어 있다. 
고창군 아산면은 최대의 고인돌 군을 형성하고 있는데 위에서 보면 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지상에 구현한 경우도 있다. 고인돌 문명포럼에서 정병우 선생의 주장에 의하면 제일 큰 수백 톤의 고인돌은 북극성을 상징하고 이 고인돌 옆에는 그보다 작은 여왕 고인돌이 있으며 여왕 고인돌 근처에는 자녀를 상징하는 고인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왕릉의 석물처럼 수호장수 모양의 고인돌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고인돌은 예사로 위치해 있는게 아니고 고인돌들이 치밀한 각본을 짜서 배치한 기념물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더욱 놀라운 것은 고인돌은 천문관측 기구의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달력이 없었던 시절에도 춘분과 추분, 동지와 하지는 중요한 기준점이었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농사와 수렵의 시기가 정해졌고 이를 알기 위한 지혜로 고창군 송암리의 고인돌은 일출방향에 맞추어 축조 되어있고 일출방향에 맞추어 여섯 개의 고인돌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해가 뜨는 시계방향을 가리키는 시계바늘의 역할을 했으며 낮이 긴 하지와 밤이 긴 동지 때 일출방향이 고인돌의 배열선상과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받침석인 다리가 있는 고인돌은 춘분, 추분의 일출시점 사이에 태양이 그 고인돌의 2개다리 사이로 정확하게 꿰맞춰 진다고 하니 이것은 우연인지 아니면 계산된 배치인지 그저 신비롭기만 할뿐이다. 앞서 설명 드린바와 같이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무덤을 넘어서 죽은 자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신앙의 대상이요 그들 나름대로의 과학이 숨어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많은 역사의 흔적들은 지워져 갔지만 고인돌은 그 자리에 남아 우리의 오랜 선조들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다. 수천 년의 세월 속에 변하지 않는 고인돌과 함께 우리의 옛 조상들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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