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킹메이커 한명회. 죽어서도 목이 잘린 사연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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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킹메이커 한명회. 죽어서도 목이 잘린 사연은? ②
  • 권영국 소장
  • 승인 2024.01.12 2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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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후손들은 교훈을 얻는다. 현대인들의 지나온 삶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 치과기공사로서는 드물게 역사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장(비전포럼 명예회장)의 색다른 역사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단종은 세조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올라 잠시 평온한 일상을 보내게 되었지만 충신들의 반란에 정국은 또다시 피바람을 불러오게 된다. 그 사건은 세조는 왕으로서 정통성이 없어 단종을 다시 왕으로 추대해야 된다는 단종복위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충신들은 세조를 제거하려는 작전도 폈지만 사전에 이를 간파한 한명회의 기지로 그 조차 실패하게 됐고 성삼문, 박팽년 등의 사육신을 주살하는데 앞장선 한명회는 세조의 듬직한 오른팔이 됐고, 세조는 이런 일이 계속될 것을 우려해 단종을 영월로 유배보낸 후 결국 사사하는 참극을 벌였는데 그 일련의 사건들을 기획하고 실행했던 인물이 바로 한명회였던 것이다.

세조는 심복인 한명회를 우의정에 앉히고, 14번이나 조체찰사로 지방에 파견하여 명분이 약한 자신에 대한 반란을 막으려 하는 일에 한명회를 활용했다. 한명회는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466년에는 최고 권력인 영의정에 오르며, “천하가 이 손안에 있소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한명회는 본처에게 1남 4녀의 자식이 있었고, 첩의 자식까지 합하면 20명 가까운 자식이 있었으니 왕 부럽지 않은 영화를 누렸으며, 그 중 본처의 여식인 셋째 딸을 수양대군의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과 혼인시켜 왕과 사돈이 됐는데 세조가 승하하고 첫째 아들인 의경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그가 8대왕 예종이 되었으며, 한명회의 셋째 딸은 왕의 정비인 안순왕후가 됐다.

예종은 왕위에 오른지 15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했고 세조의 손자이며, 이미 자신의 넷째 딸과 혼인을 시킨 자을산대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국 왕위에 앉히니 그가 9대왕 성종이 되면서 그의 넷째 딸은 공혜왕후가 되었던 것이다.

자을산대군은 일찍 죽은 의경세자와 인수대비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에 이어서 첫째 아들인 월산대군이 왕위세습의 유력한 대상자였지만 세조의 비이며 당시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정희왕후는 둘째 손자인 자을산에게 왕의 교지를 내렸는데 이는 한명회가 자을산의 뒷배에 있었던 장인이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고, 그가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이 된 9대왕 성종은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7년간 수렴청정을 했고, 성종이 20세가 되자 인수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려 하자 한명회는 자신의 권력이 약해질까봐 인수대비가 수령청정을 그만두는 것을 반대하다가 그로 인해 성종과 사이가 나빠지고 병에 걸렸다는 이유를 대며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관직에서 물러난 한명회는 노후를 편안히 보내기 위해 지금의 동호대교 인근에 멋진 정자를 지었는데 그 정자를 갈매기와 노닌다는 뜻인 압구정이라 지었으며 구정은 그의 호이기도 하다.

 

압구정은 그냥 평범한 정자가 아니라 수려한 경관은 물론 규모나 예술적으로 뛰어난 정자여서 외국의 사신이 오면 꼭 들러야 할 필수 관광 코스였다고 한다. 그의 정자가 있었던 자리에 지금도 비석이 남아 있는데 압구정동 구 현대아파트 놀이터의 한 켠에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뒤로하고 한명회는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정신이 나간 왕 연산군이 등극하는데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윤씨의 복수를 하기 위해 피를 불렀던 갑자사화때 한명회도 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그의 무덤을 파헤쳐 이미 죽은 한명회의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를 하게 된다.

연산군 일기를 보면 “한명회의 무덤을 파헤치고, 백골을 참시하게 하고 목뼈는 저자거리에 걸어 놓도록 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보면 그렇게 날고 뛰었으면 뭐하겠는가? 인생은 그저 허망할 뿐이다. 한명회의 묘는 현재 천안시 수신면에 자리하고 있다. 

역사는 누구의 입장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충신이 되기도 하고 역적이 되기도 한다. 한명회는 세조의 입장에서는 더할 수 없는 책사이며, 충신이었고, 반대로 단종과 그의 충신들 입장에서는 역적이 되는 상황이었으니 우리 후대에 이를 평가하는 문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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