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피의살육 두문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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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피의살육 두문불출
  • 권영국 소장
  • 승인 2024.02.13 1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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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후손들은 교훈을 얻는다. 현대인들의 지나온 삶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 치과기공사로서는 드물게 역사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장(비전포럼 명예회장)의 색다른 역사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두문불출’ 이라는 고사성어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 말은 집안에 틀어박혀 일절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인데 이 두문불출의 유래는 조선을 건국했던 시기에 끔찍했던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나온 일화이다.

두문동 사건은 고려를 잠재우고 이성계가 구데타를 일으켜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상황 가운데 이를 반대한 고려의 충신 72명이 두문동에 들어가 항거하다 결국 모두 불에 타죽은 끔찍한 사건을 말한다.

1392년 임신년 7월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에게 왕위를 물려받고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게 되는데 이는 변방의 장수가 스펙좋은 고려의 권문세족들의 무시당하며 정치적 입지를 펼 수 없었기에 수도를 천도하여 새롭게 나라를 열어 가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신하였던 권문세족들과 고려의 왕족 중에서 이성계에게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개성에 남았고 따라가지 않았다. 새 조정이 구성되었지만 이를 반대하며 벼슬을 거부한 충신들은 깊은 산속에 은거하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지내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 마을을 두문동이라 불렀다. 이들은 매일 이른 아침 의관을 정돈하고 고려의 왕이 있는 방향을 향해 울면서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전국에는 두문동이라 불리우는 지명이 상당히 많지만 이 사건이 일어난 두문동은 황해북도 개풍군에 있는 광덕산의 서쪽 골짜기에 있는 지역을 말한다. 개성지에 의하면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후 고려의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과거시험을 열고 고려의 유신들을 등용하려 했으나 고려의 유신인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등 72인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키기 위해 부조현이라는 고개에서 조복을 벗어던지고 관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초라한 초립을 쓰고 이 곳 두문동에 들어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서두문동에서는 72인의 선비가, 동두문동에서는 48명의 무인이 자리를 잡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고 한다. 그 마을 입구에 사립문을 설치하였는데 그 문은 항상 굳게 닫혀있었고 문 옆에 가죽채찍을 걸어놓았다고 하는데 배신자는 채찍을 맞고 나가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두문동에 들어간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자 그 마을 전체에 불을 질렀다. 만일 그들이 불을 피해 밖으로 뛰어나오면 조선의 관리로 벼슬을 주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려는 의도였지만 두문동의 선비들은 단 한명도 나오지 않고 전부 불에 타죽는 참상이 벌어진다.

여기서 ‘두문불출’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으며  현재 그 마을에는 이들의 굳은 절개를 찬양하는 두문동비가 세워져 있다. 그 두문동비는 조선후기인 1740년에 영조가 개성을 행차하던 중 부조현에 이르렀을 때 그 유래를 전해 듣고 세워준 비석이며 이로 인해 두문동 72인의 숨겨진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전해진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영조는 두문동 72인의 후손들을 찾아 관리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전 왕조에 충성했던 선비들을 찬양하기 위해서 조선의 왕이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인데 이는 충신의 본기를 삼아 왕권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속내가 숨어있는 것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여러 분야의 산업이 발달하며 살기 좋은 세상이 됐지만 반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짙어져가는 지금의 사태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의리와 충절을 자신의 목숨과 바꾸었던 두문동의 선비들을 한번쯤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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