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공주의 남자로 산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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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공주의 남자로 산다는 건…
  • 권영국 소장
  • 승인 2022.12.26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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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후손들은 교훈을 얻는다. 현대인들의 지나온 삶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 치과기공사로서는 드물게 역사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장(비전포럼 명예회장)의 색다른 역사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이 여인과 결혼하면 정1품의 품계를 받을 수 있고 일을 하지 않아도 평생 나라에서 녹봉이 나오며 집도 주고 차도 준다. 여인의 미모 또한 뛰어나다면 이 경이로운 결혼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남성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파격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남성들은 이 결혼을 기피했다. 그 이유는 그 여인은 존엄한 왕의 딸인 공주였기 때문이다.
공주의 서열은 무품으로 품계를 초월한 존재였다. 공주의 남편을 의빈 또는 부마라고 불렀는데 이는 어원을 봐도 공주가 자신의 신분보다 낮은 신하와 결혼할 경우에 사용되는 동양적인 언어이기에 부마가 된 자는 첩을 둘 수도 없고 아내가 먼저 사망해도 재혼 역시 불가능했다. 즉 부마는 아내인 공주를 군소리 못하고 평생 모시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시댁에서도 공주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공주자가 또는 공주마마 등의 극존칭을 사용해야 했다. 더군다나 부부생활을 하면서 공주를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했다면 그 후환으로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은 자명했다.
한 예로 조선 초기 태종 때 지춘천군사였던 이속의 아들과 태종의 딸이었던 정신옹주와의 혼인이 진행되던 중 이속이 옹주의 어머니였던 후궁 신빈 신씨의 신분을 탓하며 혼인을 거절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를 안 태종이 분노하여 이속에게 장백대와 유배의 형벌을 내렸으며 관노로 전락시켰다. 또한 이속의 아들은 평생 혼인하지 못하는 형벌을 받게 되면서 왕과 신하가 논의하여 뽑았던 부마는 그 사건 이후 왕비를 뽑는 형식인 간택령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의빈으로 간택된 사람은 모두 92명이었는데 이들의 삶을 살펴보면 꽤 흥미롭다.
의빈도 경국대전 반포 전까지는 일반 관료처럼 벼슬을 한사람이 많았다. 세조의 사위였던 윤사로는 부마의 신분으로 세조의 왕위찬탈에 협조하는 등 정치에 적극 참여해 좌익공신 1등의 명분으로 의정부 좌찬성(종1품)에 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이후 성종 때 경국대전이 반포 되면서 부마는 벼슬을 할 수 없도록 제도화됐다.
공주의 부마가 되면 정1품. 옹주의 부마가 되면 정2품의 품계를 받았으며 집과 노비 그리고 녹봉도 받는 호사를 누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남자들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관직에 나아가 입신양명을 할 수도 없었기에 양반이나 사대부들은 공주나 옹주를 며느리로 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공주는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이고 옹주는 왕의 후궁의 딸을 지칭하는 말이다. 지극히 존귀한 신분으로 품계를 초월한 외명부이다. 하지만 공주와 옹주에 차이를 두어 정실과 후궁의 자식을 구별했다. 
부를 누릴 수는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내세울 수 없고, 집 안에서 부인을 모시며 살아야 하는 등 여러 이유로 보통 부마들은 아들이 많은 집안의 막내들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장손 또는 홀어머니에 외아들은 부마의 제약 대상이었다.
관직에 나아갈 수도 없고 부인인 공주가 심성이 곱지 않더라도, 부부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잘못을 하더라도 쫓아내거나 이혼할 수 없었던 부마들의 삶. 진정한 사랑이 없다면 부마의 삶은 그리 녹녹치 않았을 것 같다.
크게 눈치 보지 않고 평범하게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행복한 자들이 아닌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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