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인간 공물, 공녀의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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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인간 공물, 공녀의 잔혹사
  •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 대표
  • 승인 2023.05.3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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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후손들은 교훈을 얻는다. 현대인들의 지나온 삶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 치과기공사로서는 드물게 역사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장(비전포럼 명예회장)의 색다른 역사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공녀를 본격적으로 보내면서 10여 년 동안 청으로 끌려간 20만 명의 여인 중 운 좋게 돌아온 여인은 약 5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귀국한 여인들을 환향녀라고 불렀는데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이지만 조선에서는 그녀들을 그리 환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여성이 청나라에서 치욕을 당했기 때문이며 하물며 임신을 한 채 귀향한 여인도 있었으니, 여성의 정조와 윤리를 중시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그리 환영할 일은 아니었다.
극도의 핍박과 서러움 속에 이제나저제나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애타게 기다리던 조선의 여인들. 이들은 봉선화로 손톱에 물을 들이며 손톱의 붉은빛이 빠지기 전에 귀향한 날만 기다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이러한 일들이 여인들이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이게 된 유래가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나마 운이 좋은 여인들은 천신만고 끝에 겨우 집에 오고 보니 집안의 눈총은 싸늘했고 그 꼴을 당해놓고는 왜 살아왔냐는 분위기에 그 여인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도대체 나라가 힘이 없어 억지로 끌려간 그 여인들이 무슨 죄가 있다는 것인가? 죄가 있다면 나라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지도층이 문제가 아니었겠는가?
이 때문에 사대부가는 이혼을 요청하는 민원이 빗발쳤다. 당시 사대부의 이혼은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이 과정을 허락해달라는 민원이 엄청났다. 
그에 반해 임금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는 평민 여성들은 시댁이나 남편에게 쫓겨나 자결하거나 다른 고을에서 숨어 살며 평생 환향녀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니 그 애 닳은 여인들을 두 번 죽이는 비참한 지경을 맞게 되었다.
그 유래로 말이 좀 변화된 용어인 화냥년이라는 말은 부정한 여인을 뜻하는 속어로 지금도 흔히 사용되는 말로 와전됐다.
인조는 환향녀가 큰 사회적 문제로 번지자,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청에서 돌아온 여인이 강물에 몸을 깨끗이 씻으면 심신을 정화한 것으로 규정하고 집에서 따뜻하게 맞이하라는 명을 내리고 이에 응하지 않은 자는 국법으로 엄히 다스린다는 전교를 내렸으나 현실은 그때뿐이었다. 그때 청에서 귀향한 여인들이 주로 몸을 씻었던 장소가 지금의 홍제천이었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소심한 변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대주의에 빠져 어린 처녀와 어린 남자아이들을 거세시켜 중국에 바친 조선의 왕들 때문에 속국의 오명을 지울 수 없는 얼룩진 역사를 가지게 됐다. 그들이 국제정세를 똑바로 알고 대처했다면 신하국이 아닌 명이나 청나라를 선도하는 반전이 있었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생각까지 미치는 것은 중국이 고려와 조선이 보낸 공녀들의 자식으로 계승되어진 부분도 상당 부분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가슴 아픈 역사를 접하면서 우리가 숱하게 경험했듯이 결론은 힘없는 나라는 이 꼴을 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가 이런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모두가 단합하여 그 누구든 절대로 침략할 수 없는 나라를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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